
손돌의 묘
◈ 손돌(孫乭) 說話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골의 2차 침략으로 인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다. 사공 손돌(孫乭)이 배를 몰아가는데 강화도의 광성진을 거쳐 현 초지포로 향할 무렵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가 선회하여 앞 길이 막히자 왕이 대노하여 손돌에게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다.
손돌이 “이곳은 바다의 자연암초가 선회하여 앞목이 막힌 뱃길이오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절대로 염려를 마시옵소서.”라고 진언하였다. 왕은 난을 맞아 피난하던 때라 초조한 심정에서 손돌이 무슨 흉계를 품은 것이라 착각하고 대신에게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따라가면 자연 뱃길이 트일 것이옵니다.”라는 마지막 한마디 충언을 남긴 채 참수되고 말았다. 왕은 그 바가지를 따라 진로를 택하여 무사히 난을 피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그 험한 뱃길을 피한 후에야 충성스런 손돌을 참수한 잘못을 후회하고 정절을 지키며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현 대곶면 신안리 덕포 하류 손돌목 상봉에 묘지를 만들고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쯤이면 매년 강풍과 혹한이 닥쳐오니 이는 필시 원통하게 죽은 손돌의 넋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출처:경기문화재단 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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