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울 옴마 생신

죤댈리 2013. 5. 20. 10:31

살아 계셨더라면 오늘로써 85번째 생신이다.

18세에 시집와서 7남매를 놓고 애지중지 키웠는데 하나같이 불효자식이라 저승가는 길 까지 외롭게 떠나가신 울 옴마.

희한한 일이다.

남들은 어떻는지 몰라도 난 울 옴마 젖꼭지에 하얀 젖이 나오는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젖이 불었을 땐 조금만 건드려도 내 입이 아닌 눈과 코로 젖꼭지에서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울 옴마 젖.

포데기로 날 들쳐 엎고 냇가에 빨래하던 모습.. 빨래가 끝나면 들쳐엎은 나를 치마폭으로 싸서 거꾸로 붙잡은채 세수를 시켜주시면 물이 코로 들어가고 씻는것이 싫어 울었던 모습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베틀에 앉아 밤새도록 길삼할 때 언제나 나를 곁에 두고 보살펴 주시던 울 옴마. 

무쇠솥에 밥을 지을 때면 구수한 누룽지 냄새에 '옴마 누룽지 좀' 하면 놋쇠숱갈로 박박 긁어 누룽지 주먹밥을 내어주시던 울 옴마,

국민학교 시절 줄을 서서 소풍갈 때면 저 멀리 밭에서 일하시다 뛰어와서 손에 무언가 쥐어주셨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던 농삿일 때문에 막내자식 소풍 때에 김밥도시락 제대로 못 싸 주신것이 못내 가슴에 걸려 돌돌말은 쌈지돈을 쥐어 주셨던 울 옴마.

중고등학교시절 도심지로 나와 공부할 때면 해지도록 농삿일을 하시다가도 자취생활에 필요한 밑반찬을 꼼꼼히 챙겨주시던 울 옴마.

대학에 합격하여 합격증을 쥐어 주었을 때 며칠동안 입이 귀에 걸려 좋아라 하셨던 울 옴마.

교사로 발령받아 첫 월급을 쌈지에 넣어 주었을 때 싱글벙글 하시며 다음날 살짝 내 손에 되돌려 주시던 울 옴마.

어릴쩍부터 형제들은 많았지만 그 힘을 빌지않고 홀로서기를 택한 나로서는 내 몫의 상속을 부모님 모시는 형님에게 던져 주고는 "잘 계시겠지. 잘 모시겠지." 하면서 내 앞길만 바라보고 뒤돌아 보지 않고 걸어와서 학위를 받아 학위복을 입혀줄 땐 이미 몸이 불편하여 거동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울 옴마.

작년 9월,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자식새끼 그 누구에게도 호강한번 못받아 보시고 조용히 눈감았던 울 옴마.

그런 울 옴마 생신이 오늘이다.

 

옴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글은 우연히 내 마음의 흔적과 너무도 닮은 글이 있기에 옮겨 보았습니다.

 

쇠락하는 양반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 찍혀


열 여덟 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 고지 무 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 명은 족한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 살림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해 연기로 삶아 건져

밥 짓고 국도 끓여 두 번 세 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 근처럼 무거웠네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 놓고
눈물 한 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 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하품 한 번 마음 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 수발 어찌 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 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 가득
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 녀석 세워 안아 놋쇠 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 난다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 봉사 제사는 여나무 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 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 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이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 쌍 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 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하니 넓은 집에
가믄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 것들 앞 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 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 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 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 주어 한이로다


손톱 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한 거드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한 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 했고,
고목 나무 껍질 같은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 걱정 때문일세.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 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 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 자식은 중늙은이 되어 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내 살 같은 자식들아 나 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